제목 : 위플래쉬
개봉 : 2015
감독 : 데미언 샤젤
출연 : 마일스 텔러, J.K. 시몬스
앤드류와 플래처의 악연
주인공 앤드류는 드러머의 꿈을 안고 셰이퍼 학교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지휘자로 인정받는 교수 플레처를 만난다. 영화에 플래처가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공기가 다르다. 플래처는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는 걸 보여주는 듯하다. 플레처는 음악실력이 향상되기 위해서라면 욕도 서슴지 않는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예술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앤드류는 메인 드러머 자리를 얻게 되면서 점점 플래처의 방식에 스며들어간다. 앤드류는 첫눈에 반한 영화관 매점에서 일하는 니콜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둘을 사귀게 된다. 점점 음악에 빠져가던 앤드류는 위대한 드러머가 되기 위해 니콜에게 헤어지자고 말한다. 이때부터 앤드류는 광기에 빠지고 있었던 것 같다. 공연날이 되는 날 앤드류는 차를 타고 가던 중 트럭과 교통사고를 당하고 다친 몸으로 겨우 공연장에 도착했지만 공연을 망쳐버리게 된다. 플래처는 이런 앤드류를 밴드에서 제외시킨다. 앤드류는 욕을 하며 플래처에게 덤벼 들었고 그렇게 학교에서까지 퇴학당하게 된다. 셰이퍼 학교 측의 변호사가 혹시 가혹행위를 당하지 않았냐고 물어보고 퇴학당할 마당에 잃을 것도 없는 앤드류는 하나씩 증언한다. 앤드류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플래처를 만나게 되고 플래처가 카네가 공연장에서 공연을 하는데 드러머가 마음에 안 든다며 애드류에게 같이 공연을 하지 않겠냐고 제안한다. 드러머가 되고 싶었던 앤드류의 꿈이 불이 지펴지면서 공연에 같이 하게 된다. 하지만 이건 플래처의 함정이었다. 플래처는 일부러 준비하기 못하게 다른 곡을 알려준 것이다. 사실 앤드류의 증언으로 플래처는 학교에서 퇴학당하게 되고 이에 복수하기 위해 앤드류를 부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공연장에서 앤드류에게 창피를 주기 위함이다.
한계를 넘어서는 앤드류
영화 위플래쉬의 모든 스토리는 마지막 장면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마지막 앤드류가 드럼 치는 모습은 보는 사람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플래처는 앤드류를 창피를 주기 위해 밴드와 다른 곡을 알려주지만 이에 분노한 앤드류는 다른 밴드 연주자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무작정 자신이 준비해 온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얼떨떨하던 연주자들은 앤드류의 리드에 하나둘씩 연주를 하기 시작하고 플래처도 일단 지휘를 시작한다. 그런데 앤드류가 이전과 다르다 팔이 아파와도 손에 피가 나도 아랑곳하지 않고 드럼에 몰입한다. 플래처가 학생들에게 그토록 원했던 각성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연주가 끝났을 때는 앤드류도 플래처도 시원하다는 듯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마무리된다. 사실 이 부분은 영화로 표현하기 힘든 부분임에도 이 영화는 정말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이 느낌은 영화를 직접 봐야 알 수 있다.
예술을 위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열정
예술을 위한 플래처의 방식은 너무 폭력적이다. 그래서 플래처에게 배운 선배는 정신이 이상해져 자살을 선택하는 내용이 나온다. 예술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맞을까. 아니면 예술은 즐기는 것일까. 이 부분에 답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다. 다만 영화에서 보여준 폭력적인 방식이 매우 설득력이 높아 보인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선 15세 관람가지만 외국에서는 성인등급(R)이라고 한다. 한계를 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몰아세우는 모습이 매력적인 나머지 어린 사람들이 비판 없이 따라 하는 걸 우려한 것 같다. 즐기면서 성공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고통 없이 성장하기가 쉽지는 않다. 그렇다고 자신을 파괴하면서 까지 경지에 도달해야 할까. 나는 인간이 원하는 모든 것들은 자신이 행복하기 위함이라 생각한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자신을 파괴하게 된다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엔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도 독립운동을 하던 일제강점기의 위인들이 많다. 세계 역사에도 이런 유사란 사례가 많이 있다. 각자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에 따라 갈릴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